짧은 생각

AI시대의 오타쿠

Optimization
728x90


AI 시대의 오타쿠 문화는 어떻게 변화하고 있을까요? 그 특징을 이해하기 위해서는 '작은 서사'와 '기호 소비'라는 핵심 개념을 살펴볼 필요가 있습니다.

 

 

 


오타쿠 문화의 본질은 작품 전체를 통째로 받아들이기보다, 작품을 여러 조각으로 분해해 그 안에 담긴 '기호'를 개별적으로 소비하는 데 있습니다. 작품의 심오한 본질을 탐구하는 대신, 매력적인 요소를 선택적으로 즐기는 것입니다. 한 시대를 풍미했던 애니메이션 <케이온!>을 예로 들 수 있습니다. 팬들은 작품 전체의 흐름을 즐길 수도 있지만, 작품 속 밴드의 음악에만 집중하거나 특정 캐릭터에게 몰입하기도 합니다. 더 나아가 '히라사와 유이'라는 캐릭터 한 명조차도 '백치미', '음악적 천재성', '외모'와 같은 여러 매력적인 기호의 조합으로 소비될 수 있습니다. 창작자들은 이처럼 팬들에게 어필할 수 있는 기호들을 작품 속에 효과적으로 배치하며, 이러한 창작과 소비의 흐름은 <케이온!>의 정신적 후속작이라 불리는 <봇치 더 록!>에서도 이어집니다. 어리숙하지만 천재적인 기타 실력을 가진 주인공 '봇치'는 '유이'가 가졌던 기호와 유사한 동질감을 형성하며 팬들에게 익숙한 매력을 선사합니다.

 

이러한 현상은 철학자 장 프랑수아 리오타르가 제시한 포스트모던 시대의 서사 개념과 깊이 연결됩니다. 리오타르에 따르면, 근대는 '진보', '해방', '이성'과 같은 '거대 서사'가 세상을 설명하는 중심축이었습니다. 권선징악이나 영웅의 이야기가 그 대표적인 예입니다. 하지만 포스트모던 시대에 이르러 이러한 거대 서사에 대한 믿음이 흔들리고, 그 자리를 수많은 '작은 서사'들이 파편적으로 채우게 됩니다. 오타쿠 문화는 바로 이 '작은 서사'들이 만개하는 대표적인 장입니다. 팬들은 작품 전체의 통합된 의미보다 캐릭터의 속성, 특정 장면, 음악 한 곡과 같은 미시적인 기호들을 발췌해 자신만의 취향대로 조합하고 변주하며 즐깁니다.

 

 

그리고 이제 인공지능(AI)은 이러한 '작은 서사' 만들기를 가속하는 강력한 도구로 등장했습니다. AI는 주어진 기호들을 재조합하여 그럴듯한 결과물을 만드는 데 탁월한 능력을 보입니다. 예를 들어 '미소녀', '문학소녀', '병약'과 같은 속성들을 키워드로 제공하면, AI는 그 기호들을 조합해 매력적인 캐릭터와 그럴듯한 이야기를 순식간에 생성해낼 수 있습니다.

여기서 원작 애니메이션을 '오리지널'이라 한다면, AI가 원작의 기호들을 재조합해 만든 파생 콘텐츠는 '클론'이라 비유할 수 있습니다. AI는 큰 노력 없이도 수많은 클론을 양산할 수 있게 합니다. 바로 이 지점에서 서사의 위계가 흥미롭게 재편됩니다. 본래 애니메이션은 캐릭터나 장면 같은 '기호의 나열'이라는 점에서 '작은 서사'의 집합체였습니다. 하지만 이 애니메이션이 수많은 '클론'이라는 파생 콘텐츠를 낳는 원천이 될 때, 그것은 역설적으로 일종의 '거대 서사'와 같은 역할을 하게 됩니다. 왜냐하면 '클론'이라는 작은 서사는 결국 '오리지널'이라는 상대적 거대 서사가 제공하는 세계관, 설정, 캐릭터라는 틀 안에서 만들어져야 비로소 의미를 갖기 때문입니다.

결론적으로 AI 시대의 오타쿠 문화는 원작이라는 상대적 거대 서사를 끊임없이 해체하고, 그 조각난 기호들을 재료 삼아 무한한 '작은 서사'들을 새롭게 창조하고 소비하는 역동적인 장으로 진화하고 있습니다.